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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크
You Kim
2025. 4. 25.
아직 인간처럼 걷지 못하는 로봇
2025년 4월 19일, 베이징 이좡(E-Town) 기술 허브에서 개최된 하프마라톤은 단순한 스포츠 이벤트가 아니었다. 12,000명의 인간 주자들과 함께 21대의 휴머노이드 로봇이 21.097km에 도전한 이 날, 로봇 산업의 현재 위치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주최 측은 ‘하프마라톤’이라는 포맷을 채택했다. 단거리는 기술의 ‘스턴트’를 보여주기에 적합하지만, 중거리 이상이 되면 연속적 균형, 에너지 관리, 지형 대응력 등 로봇 시스템의 전체적인 완성도가 시험대에 오르게 된다. 즉 하드웨어-알고리즘-배터리가 유기적으로 작동하는가를 묻는 자리였다.
결과는 냉정했다. 완주율은 52%. 21대 중 11대만이 결승선을 넘었다. 평균 완주 시간은 약 5시간으로, 인간 평균의 두 배를 넘었다. 가장 빠른 ‘Tiangong Ultra’조차도 세 번의 배터리 교체 끝에 느린 조깅 속도로 간신히 완주했다. 일부 로봇은 출발과 동시에 전복되었고, 몇몇은 중간에 멈춰 섰다.
이 날의 현장은 단지 “기술이 부족하다”는 표면적 진단보다 더 뿌리 깊은 질문을 던진다:
“왜 아직도 로봇은 못 걷는가?”
기술력만의 얘기가 아니다. 왜 수천억 달러가 투자된 산업이 여전히 ‘걷기’조차 버거워하는가? 왜 AI는 초당 수천 개의 프롬프트를 생성하는데, 로봇은 여전히 땅을 딛는 데 허우적대는가?
로봇의 하드웨어는 시간의 흐름을 따라 느리게 진화한다. 반면, 자본은 단기 성과를 요구하며 훨씬 빠른 속도로 움직인다. 기술의 정밀도는 반복 학습과 시스템 통합을 전제로 하지만, 자본은 분기 보고와 매출 지표를 우선한다. 결국 이 산업은 기계의 리듬과 자본의 리듬이 엇박자를 내는 구조 속에서 진화 중이다. 하드웨어는 수년 단위로 진보하지만, 자본은 분기 단위로 방향을 바꾼다. 이 시간의 비대칭성이 바로 로봇 산업의 핵심 병목이다.
AI는 클라우드 위에서 무한히 반복 학습하며 진화할 수 있지만, 로봇은 중력, 마찰, 배터리, 부품 수명이라는 물리적 조건 아래에서만 진화할 수 있다. 이때 필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속도 간의 정렬이다. 이 느림은 단순한 지체가 아니다. 하드웨어의 진화가 자본의 리듬을 따라가지 못할 때, 자본은 방향을 틀기 시작한다. 기술을 밀어붙이던 자본은 이제, 기술 위에 올라탈 구조를 찾는다.
로봇의 느린 보행은 자본과 시간의 구조적 병목이다.
하프마라톤에 출전한 다수의 로봇은 자율성이 없었다. 인간 조력자의 원격 조작에 의존한 이유는 단순히 기술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넘어지지 않는 법을 배우지 못한 것이 아니라, 넘어지지 않게 만들 수 있는 데이터셋, 반복 실행 시간, 테스트 인프라가 현저히 부족했기 때문이다. 이는 딥러닝 초기에 GPU 없이 모델을 훈련시키던 시도와 유사하다. 알고리즘은 있었지만, 그것을 작동 가능하게 할 연산력과 시간, 비용이 뒷받침되지 않았다.
로봇 보행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다. 센서 피드백, 실시간 판단, 정밀한 관절 동기화, 에너지 효율성 등 수십 개의 요소가 동시에 작동해야 가능한 복합적 행위다. 그러나 이 시스템 전체를 반복적으로 실험할 수 있는 학습 환경, 말그대로 물리적인 시간 단위의 학습 데이터가 현저히 부족하다. 로봇이 한 번 걷는 데는 수십 분이 걸리고, 실패는 물리적 손상으로 이어진다. 이로 인해 학습은 중단되고, 시스템은 다시 초기화된다. 로봇은 하드웨어인 동시에 학습을 위한 리소스 덩어리다. 속도의 문제가 아니라, 반복 자체가 불가능한 구조다.
즉 병목은 기술의 부족이 아니라, 기술이 ‘학습 가능해지기 위한 환경’의 부재에서 발생한다. 로봇 하드웨어는 태생적으로 느리게 진화한다. 문제는 그 느림을 감내하고, 반복 학습을 가능하게 할 자본 구조가 여전히 과거의 프레임에 갇혀 있다는 점이다. 빠른 회수와 지표 중심의 벤처캐피털 구조는 로봇처럼 느리게 성장해야 하는 시스템에 적대적이다. 그 결과는 명확하다. 실험은 줄고, 학습은 단절되고, 기술은 가능하지만 시장성 없는 ‘전시품’으로 남는다.
로봇은 제품에서 플랫폼으로 이동해야 한다.
로봇이 ‘걷기’를 마스터하기도 전에, 산업은 이미 다음 단계로 진입하고 있다. 하프마라톤이 드러낸 물리적 한계는 역설적으로 한 가지를 분명히 했다. 로봇이 더 이상 완성된 제품으로서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구동 가능한 플랫폼으로 작동해야 한다는 것.
중요한 것은 기술 자체가 아니다. 누구의 데이터 위에 어떤 인공지능이 올라타는가—경쟁의 본질은 이 구조 설계에 있다.
Chef Robotics는 초기 외식업체 계약을 포기했다. 고객의 요구를 맞추기보다, 데이터의 흐름을 선택했다. 반복 가능한 공정을 가진 냉동식품 기업들과 PoC를 설계하고, 고정된 동작을 로봇에게 반복시키며 데이터셋을 구축했다. 이 과정에서 수집된 픽업 데이터는 단순한 작업 수행이 아니라 AI 모델의 고도화를 위한 기반이 됐다. 빠르지는 않지만, 정확하게 배우는 방식이다.
RLWRLD는 개별 동작이 아닌 추론 구조를 학습시킨다. 이들은 대형 언어 모델을 로봇의 소프트웨어에 심고, 언어적 명령과 물리적 행위 사이의 의미망을 구축하고 있다. 단일 작업의 정밀도가 아니라, 작업 간 전이를 설계하는 방식이다. 이는 로봇이 ‘지시된 일’만 수행하는 기계가 아니라, 새로운 명령에 추론으로 대응할 수 있는 운영체제로 진화하고 있음을 뜻한다.
삼성 Ballie는 이 전환을 소비자 기술의 차원으로 끌어올린 사례다. 단순한 이동형 AI 비서였던 이 기계는, 멀티모달 LLM ‘Gemini’와 결합하면서 ‘앱 생태계의 허브’로 포지셔닝을 바꿨다. 이 로봇은 더 이상 기능이 아니라, 기능을 구동시키는 플랫폼이다.
지엽적인 요소일 수 있지만, 공통점이 있다.
반복 가능한 환경에서 데이터를 먼저 축적한다.
그 데이터를 통해 AI를 구조화하고, 플랫폼을 설계한다.
그리고 Hugging Face는 이 흐름을 오픈 생태계로 확장 중이다. 프랑스의 Pollen Robotics를 인수하고 휴머노이드 로봇 ‘Reachy’를 오픈소스로 배포한 시도는, 로봇을 하드웨어가 아닌 개발자 플랫폼으로 전환시키는 움직임이다. 안드로이드가 단말 제조사를 뛰어넘어 OS로 시장을 장악했듯, Hugging Face는 ‘AI 모델 + 오픈 하드웨어’ 조합을 통해 로봇 앱 생태계를 구축할 수 있다.
Nuro는 아예 자율주행 알고리즘을 완성차 제조사와 상용 차량에 라이선싱하며, 제품 판매에서 벗어나 알고리즘 기반 수익 모델로 이동했다.
결국 흐름은 하나로 수렴된다. 로봇은 이제 팔리는 기계가 아닌 구동되는 운영체제다.
로봇 산업의 수익 축은 이미 하드웨어의 범위를 벗어났다.
기존의 로봇 판매 모델은 단절적이다. 로봇 한 대를 판매하면 그 순간 수익은 끝난다. 피드백 루프는 차단되고, 데이터는 끊긴다. 고객과의 관계는 일회성으로 수렴된다. 제조업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 구조는 하드웨어의 성능에만 기대어 시장성과 성장성을 증명해야 한다.
반면, 플랫폼(e.g. 구독형 AI)은 구조 자체를 전환시킨다. 로봇은 더 이상 ‘소유’의 대상이 아니다. 사용자는 로봇을 통해 기능, 데이터, 서비스를 접속한다. 예컨대, 사용자의 패턴을 학습한 Gemini AI가 Ballie 위에서 작동하며, 그 작동의 반복과 학습이 구독 수익으로 환산된다. 수익의 원천은 기계가 아니라, 그 위에서 이루어지는 연산, 상호작용, 학습이다.
이는 재무적으로 세 가지 변화를 동반한다.
반복 수익: 판매가 아닌 구독. 일회성 매출이 아닌 지속적 캐시플로우
마진 확장: 소프트웨어는 변동비 없이 수익을 증대시키며, LTV가 기하급수적으로 커진다.
지분 평가의 변화: 기업의 가치는 더 이상 생산 단가나 유닛 수가 아니라, 구독 기반 MRR과 AI 운영 능력으로 산정된다.
이 변화는 되돌릴 수 없다. VC의 기준도 달라진다. 생산 설비, 단가, 판매량보다 중요한 건 모델의 업데이트 주기, 구독 유지율, 기능별 ARPU 같은 SaaS 지표다. 핵심은 하나다. 누가 데이터를 축적하며, 그 위에서 어떤 API를 구동하는가.
그 순간부터 로봇 플랫폼은 단순한 기술이 아닌 인프라가 되어 다른 플레이어들이 이 위에서 기능을 설계하고, 비즈니스를 전개하고, 네트워크를 확장하는 기반. 생태계는 세 층으로 구성된다.
하드웨어는 물리적 접점이자 데이터 수집의 시작점
개발자는 기능과 앱을 공급하는 인터페이스 설계자
사용자는 데이터를 제공하고 생태계를 순환시키는 실질 수요자
이것이 자생적 순환을 이루는 순간, 로봇은 단일 작업을 수행하는 기계가 아니라, 앱스토어처럼 기능이 올라타는 로봇 플랫폼의 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VC의 질문도 바뀌어야 한다. "이 로봇이 얼마나 잘 작동하는가?"가 아니라, "이 플랫폼 위에서 얼마나 많은 비즈니스가 작동할 수 있는가?"
하드웨어는 느리게 진화하지만, 플랫폼 위의 AI는 하루에도 수천 번 재구성된다. 이제 중요한 것은 기계를 잘 만드는 능력이 아니다. 기계를 구동할 수 있는 권한을 누가 가지는가. 그것이 곧 로봇 비즈니스의 자본이다.
VC는 기계가 아닌, 미래를 만드는 팀을 찾아야 한다
속도는 시야를 흐리게 한다. 중요한 건 얼마나 빠르게 움직이느냐가 아니라, 어디를 향해 움직이고 있느냐다. AI와 데이터, 반복 가능한 학습 환경, 그리고 지속 가능한 수익 모델—로봇이라는 느린 몸 위에서 이 모든 것이 동시다발적으로 올라타고 있다.
로봇 업체들이 ‘당장 필요한 기능’을 맞추는 대신, ‘반복 가능한 학습 환경’을 먼저 설계하는 이유는 이유는 명확하다. 데이터를 쌓을 수 있는 환경에서만 AI는 학습하고, 그 학습은 비즈니스로 전환될 수 있다. 이 전략은 기술적 전환이 아니라, 시장 진입의 우선순위를 완전히 다시 짠 선택이었다.
수익 모델 또한 과거에서 벗어나야 한다. 하드웨어 한 대당 수천만 원을 받는 방식은 매출은 만들지만 관계를 끊는다. 반복은 없고, 데이터는 남지 않는다. 반대로, 사용량에 기반한 구독 모델이나 과금 기준이 명확한 성과형 모델은 고객을 락인시키고, 기술 신뢰성을 수익으로 전환시킨다. 제조·물류·헬스케어 같은 산업일수록 이 방식에 대한 수용성이 높다. 기술이 실제 성능으로 검증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까지 오기 위해선, 단순히 기계를 잘 만드는 팀이 아닌 AI 학습이 가능하도록 데이터 흐름을 설계하고, 외부 개발자들이 기능을 구현하고 확장할 수 있도록 생태계 인터페이스와 빌딩블록을 마련하며, 다양한 플레이어가 얹힐 수 있는 플랫폼을 구성할 수 있어야 한다.
Hugging Face도 단순한 로봇 제조가 아니라, 로봇을 중심으로 개발자 생태계를 호출할 수 있는 인프라를 설계했다. 그것이 Pollen Robotics 인수의 본질이다.
투자의 타이밍 역시 ‘완성’이 아니라 ‘작동’에 맞춰야 한다. AI 모델이 돌아가기 시작한 시점부터 데이터는 복리로 쌓인다. 이 데이터는 단순히 기능 개선에 그치지 않고, SaaS 기능, 알고리즘 라이선스, 타 산업 전이 자산으로 확장된다. 눈에 보이는 하드웨어보다, 보이지 않는 학습과 연결, 반복과 진화를 추적할 수 있어야 한다.
VC가 로봇 시장에서 주목해야할 할 4가지 요소는 다음과 같다:
데이터 중심 진입전략 – 학습 가능한 환경 구축이 가능한 초기 시장
구독형 과금 모델 – 사용량·성과 기반 현금흐름 구조로의 전환
생태계 설계 능력 –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분리된 것이 아닌, 통합된 플랫폼으로 작동
AI 데이터의 자산화 – 로봇이 움직일수록 데이터가 축적되고, 그 데이터가 타 산업으로 확장 가능한 구조인지
지금의 로봇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위에 올라간 것들은 이미 작동을 시작했다. VC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 로봇이 얼마나 잘 움직이는가가 아니다. 이 기계를 통해 어떤 데이터가 쌓이고, 어떤 AI가 학습되며, 어떤 생태계가 파생되고 있는가다. 그 모든 것을 묶는 질문은 하나다—이 팀이 만들어내는 건 기계인가, 미래인가.
로봇은 아직 느리다. 하지만 이미 움직이고 있다.
애플이 스마트폰에서 증명한 건 카메라나 디스플레이가 아니었다. ‘앱을 올릴 수 있는 공간’을 먼저 설계한 것이었다. 그 구조 위에서 개발자와 사용자가 연결되며 네트워크 효과가 자가 증식했다.
‘앱스토어형 로봇’이란 개념은 더 이상 은유가 아니다. 기능을 내려받고, 데이터를 축적하며, 새로운 사용 사례가 스스로 확장되는 구조. 제품을 파는 산업은 한 번에 끝난다. 하지만 기능이 연결되는 플랫폼은 반복된다.
로봇이 그 흐름을 재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