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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크
You Kim
2025. 7. 24.
모두가 AGI의 신기루를 좇을 때, 돈은 조용히 다른 곳으로 향하고 있다. 화려한 AI 인재 경쟁의 뒤편, 현실의 지루하고 고된 문제를 파고드는 ‘먼데인 테크(Mundane Tech)’가 소리 없이 거대한 자금을 집어삼키는 중이다. 혁신이 반드시 파괴적일 필요는 없다는 것, 혁신은 가장 빛나는 곳이 아닌 가장 비효율적인 곳에서 태어난다.
Unsexy Tech라는 역발상
‘유니콘’이라는 말을 처음 만든 Cowboy Ventures의 창업자 Aileen Lee는 최근 팟캐스트에서 자신의 투자 철학이 변함없이 ‘지루한 기술’에 쏠려 있음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그가 말하는 ‘먼데인 테크’란, 인류를 구원하거나 의식을 가진 AI를 만드는 대신, 수십 년간 변치 않은 산업의 낡은 관행을 기술로 대체하는 것을 뜻한다. 물류, 건설, 보안, 제조업 등 겉보기엔 매력 없지만 거대한 시장 규모와 고질적 비효율을 품은 곳들이다.
AGI나 소셜미디어처럼 승자독식의 홈런을 노리기보다, 기존 산업의 명확한 문제를 풀어 '매출'이라는 확실한 안타를 꾸준히 치는 스타트업에 주목한다. 이들은 기술 그 자체보다 기술을 통한 ‘문제 해결 능력’으로 스스로를 증명한다. 투자자들에게 이는 ‘High risk, high return’의 도박이 아닌, 예측 가능한 성장을 보장하는 현명한 베팅이다.

돈의 흐름이 말해주는 것
최근 투자 유치 사례들은 이 흐름을 명확히 보여준다. 방산 테크 유니콘 Anduril 출신들이 설립한 'Fortitude'는 군사 물류 시스템을 엑셀에서 해방시키겠다는 목표 하나로 2,400만 달러를 유치했다. Waymo 출신 엔지니어들이 세운 ‘Bedrock Robotics’는 8,000만 달러를 투자받아 건설 현장의 굴착 작업을 자동화하고, ‘Asylon’은 2,600만 달러를 유치해 원격 조종 로봇 경비견으로 인간의 3D(위험하고, 더럽고, 지루한) 업무를 대체한다. 배달 로봇으로 시작했던 ‘Cartken’이 공장 내부 물류 로봇으로 피봇한 결정 또한 '화려한 내일'보다 '돈 되는 오늘'의 문제를 푸는 것을 선택한 사례다.
이러한 흐름은 소프트웨어도 예외는 아니다. 복잡한 규제와 컴플라이언스는 가장 대표적인 ‘지루한’ 시장인데, 예를 들어, 기업의 탄소 배출량 회계를 자동화하는 플랫폼 ‘Persefoni’나, 데이터 거버넌스 및 개인정보보호 규정(GDPR 등) 준수를 자동화하는 'DataGuard' 같은 스타트업들은 컨설턴트와 변호사들이 수작업으로 하던 일을 대체하며 막대한 가치를 창출한다.
HR이나 회계처럼 모든 기업에 필수적인 백오피스 업무도 마찬가지다. 중소상공인의 급여 정산과 복리후생을 통합 관리해주는 ‘Gusto’나, 기업의 법인카드 및 지출 관리를 간소화해주는 ‘Brex’와 ‘Ramp'는 유니콘을 넘어 데카콘 기업으로 성장했다. 이들의 성공은 새로운 시장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모든 기업이 이미 돈과 시간을 쓰고 있던 비효율적인 영역을 파고들어 ‘10배 더 나은 해결책’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AI Hype의 피로감, 그리고 진짜 해자의 가치
왜 지금 ‘먼데인 테크’인가? 첫째는 단연 AI Hype에 대한 피로감과 거품 붕괴에 대한 우려다. 천문학적 자금이 쏟아부어지지만, 아직 명확한 수익 모델을 찾지 못한 생성형 AI 프로젝트들과 달리, 먼데인 테크는 첫날부터 명확한 고객과 해결 과제, 그리고 ROI를 제시한다. 가상의 문제를 푸는 것이 아니라, 실존하는 기업의 비용을 절감하고 생산성을 높여주기 때문이다.
둘째는 ‘진짜 해자’에 대한 재평가다. 뛰어난 알고리즘은 결국 후발주자에게 따라잡히거나 오픈소스로 풀릴 수 있다. 하지만 건설 현장의 워크플로우에 깊숙이 통합된 로봇 시스템, 특정 산업의 복잡한 규제와 데이터를 독점한 B2B SaaS는 쉽게 복제할 수 없다. 물리적 세계와의 접점, 산업별 도메인 지식, 그리고 실제 운영 데이터 자체가 강력한 진입장벽이 된다. 이것이 바로 먼데인 테크가 구축하는 단단한 해자다.
AI는 세상을 바꾸겠지만 그 방식은 우리가 기대하는 것과 다를 수 있다. 변화는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땅에 발을 딛고 가장 지루한 현실의 문제와 씨름하는 과정에서 온다. 자본이 향하는 곳은 바로 그 지루함의 한복판이다. 진짜 혁신의 무대는 낡은 스프레드시트와 복잡한 규제 문서 속에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