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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겨울이 오면 돌아갈 곳이 없다

반도체, 겨울이 오면 돌아갈 곳이 없다

You Kim

2026. 6. 8.

지난 4일 대만 신주에서 열린 TSMC 주주총회에서 웨이저자 회장은 가격 인상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 대해, 수요가 강력한 만큼 가격을 올리고 싶다고 밝히면서도 “(SK하이닉스 같은) 메모리 회사들처럼 갑작스럽게 가격을 인상하는 방식은 지속가능하지 않다”고 선을 그었다. 메모리를 만들지 않는 세계 최대 파운드리의 수장이 메모리 호황의 방식에 의문을 단 것이다. 

후행지표와 선행지표의 간극

데이터센터에 들어간 돈을 회수할 만큼의 AI 애플리케이션 수익이 보이지 않는다고 경고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하이퍼스케일러들이 쏟아부은 AI 인프라 투자를 정당화하려면 AI 생태계가 해마다 그만큼의 새 매출을 만들어야 하는데, 지금 수익화 속도로는 그 간극이 메워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한정 GPU를 사들여 클러스터를 쌓던 국면은 지났고, 인프라의 단순 확장에서 운용 비용 최적화와 추론 효율로 방향을 틀고 있다.

국내 반도체 시장분위기는 이보다 좋을 수 없다. BoA는 2026년을 1990년대 PC 붐에 버금가는 메모리 슈퍼사이클로 부른다. 올해 D램 매출이 전년보다 51%, 낸드 매출이 45% 늘고, ASP는 D램이 33%, 낸드가 26% 오른다고 전망한다. 이 호황의 중심에는 HBM이 있다. SK하이닉스는 2026년 HBM 물량이 모두 팔렸다고 발표했고, HBM3E에 이어 HBM4 물량을 두고 고객들이 벌써 2027년 분까지 줄을 선다. 5월 말 SK하이닉스 시가총액은 1조 달러를 넘어 마이크론·삼성전자와 함께 메모리 세 회사가 모두 1조 달러 클럽에 들었었다. 한국 증시에서 이 두 회사가 코스피 시가총액의 40%를 넘게 차지하고, 올해 경상수지 흑자 전망은 사상 최대다.

하이퍼스케일러의 데이터센터 구축은 통상 2-3년 전 수립된 capex 계획에 따라 집행된다. 즉, 현재 반도체 시장이 누리는 호황은 과거 승인된 예산이 소진되는 결과인데, 만약 최근 제기되는 AI 수익화 지연 문제가 다음 예산 편성 주기에 반영되어 투자가 축소될 경우, 메모리 업계는 시차를 두고 급격한 수요 절벽에 직면하게 된다. 상류에서 물이 줄어들더라도 하류는 한동안 그 사실을 모른다.

병목은 머물러있지 않는다

AI 산업의 헤게모니는 한 자리에 머문 적이 없다. 초기에는 연산이 병목이었고 그 자리를 엔비디아 GPU가 쥐었다. 그런데 빨라지는 GPU의 연산 속도를 데이터를 실어 나르는 속도가 따라가지 못했다. 프로세서와 메모리 둘 사이를 오가는 통로가 좁으면 아무리 빠른 연산 유닛도 데이터를 기다리며 놀게 된다. 이 '메모리 장벽'이 AI 성능을 누르는 진짜 제약으로 떠올랐고, 병목은 연산에서 메모리로 옮겨갔다. 그리고 그 해법으로 떠오른 것이 HBM이었다. 여러 D램 다이를 TSV(Through Silicon Via)로 수직으로 쌓고, 실리콘 인터포저 위에 GPU와 나란히 올려 데이터가 오가는 폭을 넓힌 것이다. SK하이닉스는 이 분야를 적시에 선점해 엔비디아의 헤게모니 일부를 나눠 받았다. 원천 기술과 파운드리 사이에서 고를 수 있었던 가장 영리한 추격 전술이었고, 결과적으로 숫자로도 증명됐다.

문제는 병목이 한 곳에 머물지 않고 계속 옮겨간다는 점이다. 그러면 다음 병목은 어디로 갈까?

첫째, HBM은 데이터 통로를 물리적으로 넓혀 메모리 병목을 완화했지만, 비용과 발열 문제를 수반한다. 이에 대한 구조적 대안으로 데이터를 GPU로 보내는 대신 메모리 근처에서 직접 연산하는 방식이 대두되고 있다. 최근 스타트업 엑시나(XCENA)가 '데이터 이동 자체가 AI 연산의 진정한 병목'이라는 명제로 1억 3,500만 달러 규모의 시리즈B 투자를 유치한 것이 대표적이다. 이는 HBM 중심의 현행 아키텍처가 영구적인 해답이 아니며, 자본 시장 역시 다음 단계의 하드웨어 폼팩터를 적극적으로 탐색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둘째는 패키징 생태계의 종속이다. 전공정 미세화가 옹스트롬(0.1nm) 단위에서 물리적 한계에 직면하자, 반도체 산업의 가치 창출은 서로 다른 칩을 결합하는 이종 집적 패키징으로 이동했다. 현재 이 시장의 지배자는 TSMC(CoWoS)다. 국내 기업이 HBM 수율을 아무리 높이더라도, 이를 GPU와 결합하는 CoWoS 라인의 캐파가 전체 AI 가속기 공급량을 결정짓는 실질적 병목으로 작용하고 있다. 더하여, 구리 배선의 발열과 전력 소모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데이터를 빛으로 전송하는 실리콘 포토닉스 광 패키징마저 TSMC가 양산을 주도하고 있다. 국내 기업이 메모리 단품의 수율 경쟁에 집중하는 사이, TSMC는 차세대 인터페이스 표준까지 선점하며 AI 하드웨어 생태계의 권력을 독점하고 있다.

셋째는 전력 인프라의 병목이다. AI 칩의 연산량이 폭증하면서, 제조사들은 순간적인 전압 강하를 막기 위해 실리콘 내부에 깊은 구조를 형성하는 트렌치 커패시터까지 동원하며 단위 칩의 전력 효율을 한계치까지 쥐어짜고 있다. 그러나 그보다는 거시적으로 데이터센터에 막대한 전력을 공급할 송전망, 이를 감당할 발전원(최근 원전이 필수 대안으로 부상 중이다), 그리고 랙 단위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을 통제할 차세대 냉각 시스템의 확보 여부가 산업의 성장 속도를 결정짓고 있다. 이는 국내 반도체 기업들이 메모리의 성능과 수율을 아무리 높이더라도 자체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외부 종속 변수다. 

결론적으로 데이터 이동, 패키징, 전력이라는 세 가지 핵심 병목 모두 국내 반도체 기업의 통제권 밖에 있다. 메모리 근접 연산과 지능형 메모리(PIM)로 대표되는 차세대 아키텍처는 글로벌 팹리스 생태계가 헤게모니를 다투는 영역이며, CoWoS부터 광 패키징에 이르는 조립 공정은 TSMC가 사실상의 표준을 선점했다. 전력 문제 역시 미국 빅테크의 자본력과 중동의 오일머니가 주도하는 인프라 패권 경쟁으로, 이미 단일 칩 제조사의 역량 범위를 벗어났다. 국내 기업들 또한 PIM과 차세대 패키징 R&D에 자본을 투입하고 있으나, 생태계의 룰을 세우거나 밸류체인의 핵심 분야를 장악하는 주도자 단계에는 이르지 못한 것이 냉혹한 현실이다. 

겨울이 오면 돌아갈 곳이 없다

반도체 산업은 본질적으로 사이클 산업이다. 수요가 급증하면 가격이 상승하고, 이는 대규모 증설로 이어진다. 그러나 팹 건설부터 양산까지 수년의 시차가 존재하여, 증설 물량이 출회될 시점에는 수요 둔화와 맞물려 가격 폭락과 다운사이클이 발생하는 패턴을 반복해 왔다.

최근 시장에서는 AI의 구조적 수요가 이러한 사이클을 소멸시키거나 단축할 것이라는 낙관론이 대두된다. 이는 막대한 AI 인프라 투자가 그에 상응하는 매출로 회수된다는 가정이다. 5대 하이퍼스케일러의 올해 capex는 7,250억 달러로 전년 대비 77% 증가했으며, 내년에는 1조 달러 돌파가 예상된다.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매년 6천억 달러 규모의 신규 AI 매출이 필요하다는 분석이 제기되나, 투자와 회수 간의 간극은 벌어지고 있다. MIT 연구에 따르면 기업이 생성형 AI에 투입한 300-400억 달러 중 95%가 아직 유의미한 손익 성과를 내지 못했다. AI 수익화 지연이 투자 축소로 이어질 경우, 시차를 두고 수요 절벽이 발생하는 전통적인 다운사이클이 재현될 가능성이 높다.  

과거 국내 메모리 산업은 이러한 다운사이클 국면에서 압도적인 범용 시장 점유율을 바탕으로 치킨게임을 버텨내는 체력을 보유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르다. 국내 기업들은 HBM 등 고부가 제품의 마진을 확보하기 위해 생산능력을 집중했다. HBM은 동급 DDR5 대비 웨이퍼 소모량이 3배에 달해, 결과적으로 범용 라인 가동률 하락과 단가 급등을 초래했다. 이러한 부품 가격 상승은 IT 기기(PC, 스마트폰) 제조사의 원가 부담으로 작용해 판가 인상을 유발했고, 소비자의 교체 주기를 지연시키며 IT 전방 수요를 억누르는 부메랑이 되고 있다.

한국이 HBM에 집중하며 발생한 레거시(DDR4, 구형 DDR5 등) 시장의 공백은 중국이 잠식하고 있다. 내수 시장과 정부 보조금을 기반으로 창신메모리(CXMT)와 양쯔메모리(YMTC)가 점유율을 빠르게 확대 중이다. CXMT는 1분기 D램 점유율 세계 4위에 진입했고, 한국 제품 대비 15-20% 낮은 단가를 무기로 글로벌 공급망에 침투하고 있다. 삼성전자 출신 경계현 전 사장 역시 한국공학한림원 포럼에서 중국의 대규모 증설로 인한 2026년 하반기 메모리 가격 하락 가능성과 빅테크 투자 부진에 따른 2028년 이후의 수요 둔화 리스크를 경고한 바 있다. 그는 파운드리와 팹리스 생태계가 두터운 대만과 달리, 한국은 메모리 편중 구조로 인해 산업적 충격을 흡수할 완충 지대가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여기에 지정학적 리스크가 비용 부담을 가중시킨다. 미국은 첨단 반도체 공급망 내재화를 위해 고관세 위협 등을 동원해 메모리 생산 기지 이전 압박을 강화할 소지가 높다. 노무라증권에 따르면, 국내 기업이 이러한 통상 리스크를 헤지하기 위해서는 2027년부터 2030년까지 연간 합산 투자의 25%에 달하는 100조 원 이상을 미국 내 설비에 분담해야 할 것으로 추산된다. 이는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등에 계획된 국내 자본 지출을 분산시키고, 국내 소부장 생태계의 성장을 제약하는 요인이다.

결과적으로 국내 반도체 산업은 AI 밸류체인 상단의 주도권(아키텍처, 패키징)을 확보하지 못한 채, 기초 체력 역할을 하던 하단의 범용 시장마저 중국에 내주었다. 여기에 대외적 통상 압박까지 더해지며 사이클 하락 시 완충할 수 있는 구조적 기반을 상실해 가고 있다. 

셀러스 마켓의 착시

최근 TSMC 웨이저자 회장은 AI 수요에 대한 자신감을 드러내며, 공급이 수요를 따라잡기까지 수년이 걸릴 것으로 전망했다. 현재 반도체 시장은 메모리와 파운드리 모두 부르는 게 값인 셀러스 마켓이다. 그렇다면 TSMC와 국내 메모리 기업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는 무엇일까. 이는 단순히 가격 인상 여부가 아니라, 이익을 창출하는 구조적 기반에 있다.

TSMC의 이익은 '대체 불가능성'에서 나온다. 최선단 공정(3nm, 2nm)과 고성능 칩 패키징(CoWoS) 라인을 동시에 대규모로 가동할 수 있는 곳은 사실상 TSMC가 유일하다. 고객은 기술적 종속성 때문에 TSMC의 가격 인상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다. TSMC의 이익은 시장의 변동성이 아니라, 고객이 이탈할 수 없는 생태계 플랫폼이라는 구조적 우위에 기반을 둔다.

반면 국내 메모리 기업(삼성전자, SK하이닉스)의 이익은 가격 그 자체에 크게 의존한다. 메모리는 기술이 상대적으로 표준화되어 있고, 경쟁사도 여러 곳 존재하기 때문에 가격 변동에 민감하다. 가격이 급등하면 단기간에 막대한 이익을 내지만, 가격이 하락하면 원가 이하로 판매해야 하는 상황까지 내몰린다. 실제로 2022-2023년처럼 가격이 급락했을 때 메모리 사업은 큰 적자를 기록한 바 있다. 즉, 메모리 사업의 이익은 가격 사이클에 직접적으로 묶여 있는 구조다. 가격이 좋을 때는 돈을 많이 벌지만, 가격이 꺾이는 순간 이익도 함께 급락하는 취약성을 가지고 있다.

HBM이 수주형 메모리로 진화하며 락인 효과를 일부 확보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TSMC가 수많은 팹리스를 아우르는 지위를 가진 반면, 한국의 HBM은 사실상 엔비디아라는 단일 빅테크의 아키텍처에 종속된 형태다. 고객 다변화가 결여된 단일 벤더 종속성은 전방 시장 수요 둔화 시 즉각적인 가격 결정권 상실로 직결된다.  

웨이저자 회장이 "TSMC의 가격 정책은 메모리 기업과 다르다"고 선을 그은 것이 이 뜻이다. 수급 부족에 기대어 단가를 올리는 메모리식 수익 모델은 수요 둔화 시 즉시 흔들리지만, TSMC는 고객의 설계를 독점 구현하는 운명 공동체로서 사이클의 타격을 덜 받는 구조를 완성했다는 의미다.

AI 수요는 실재하지만, 현재 국내 반도체가 누리는 이익의 상당 부분은 호황기 정점의 가격 프리미엄에 의존한다. TSMC처럼 기술적·생산적 락인으로 안정적 마진을 방어하는 구조와는 거리가 멀다. 따라서 AI 투자 사이클이 꺾이고 경쟁이 심화되는 국면이 오면, 국내 반도체는 과거처럼 범용 시장의 기초 체력이라는 완충 장치조차 없이 수요 절벽을 맨몸으로 버텨야 한다. 지금의 화려한 실적 이면에서 물어야 할 것은 정점 이후를 버틸 구조적 기반이 존재하는가이다.